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문단 편집) == 명칭 == 이 사건을 두고 [[대한민국]]에서는 의거라고 칭하고 [[일본]]에서는 단순히 사살(射殺), 저격, 암살, 그리고(꼭 극우가 아니더라도 사전적 의미 그대로) 종종 [[테러]][* 테러의 의미는 '무력을 통해 정치적인 의사를 표출하는 행위', '정치적인 목적을 위한 폭력 행위'다. 따라서 행위의 형식만 보면 사전적 의미의 '테러'지만 현재 보편적으로 '테러'라고 하면 순전히 악한 의도로 일으키는 중범죄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의열(義烈) 투쟁'이라고 한다. 물론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의 독립운동과 이를 지원하고 명령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상해임시정부]]의 행보까지 의열 투쟁이라고 칭한다.]라고도 한다.[*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사전인 코지엔(広辞苑)이나 macOS에 기본 탑재되어 사용율이 꽤 높은 다이지린(大辞林) 같은 사전에서는 안중근을 [[독립운동가]]로 소개하고 있다. 코지엔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안중근: 조선의 독립운동가. [[가톨릭]]교도이며 학교를 설립. 또한 의병을 조직. 1909년 10월 26일 전(前) 한국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살해하여 사형. 한국 / 북한에서 의사로 칭해진다. (1879년 ~ 1910년)] [[훙커우 공원 의거]] 등 무장 독립투쟁도 그렇듯 [[위키백과]]처럼 특정 국가의 이익을 대변치 않는 [[위키]]에서는 '테러'냐, '독립투쟁'이냐를 두고 유저들이 싸우는 일이 잦다. 일본 제국의 조선 식민지화가 적법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당시엔 그게 세계적으로 국제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았고 일본 입장에선 "자기들의 수뇌부를 테러했다"고 볼 수 있다. 한국 일각에서는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항일 [[의병#s-5]]과 [[일본군]]이 이미 수 년 전부터 교전 상태였으므로 교전 중인 적국의 수뇌부 인물을 공격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적국의 요인을 암살하는 것은 [[특수부대]]의 전형적인 특수 작전으로 볼 수 있다고 해석한다. 안중근은 한때 '항일 의병장'이었지만 이토 히로부미 암살 당시에는 휘하 병사를 거느리고 교전을 벌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국의 후방에 침투하여 교란, 요인 암살 등을 주된 임무로 하는 특수부대는 현대에도 존재하며 교전 중인 적국에 대한 매우 유효한 전술이다. 이미 수 년 전부터 항일 의병과 [[일본군]]은 [[교전]] 상태였으므로 안중근의 암살은 항일 의병의 일원으로서 교전 중인 적국의 수괴를 사살한 특수 작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가 있다. 요인 암살을 위한 [[특수전]] 전문 의병부대를 창설한 뒤 거사에 임했다고 보면 된다.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에서는 구한말 조선을 침략하고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일본군 출동을 통한 농민군 학살 및 진압, 1895년 [[을미사변]], 1905년 [[을사조약]], 1907년 [[정미 7조약]]과 [[대한제국 군대 해산]], 고종의 강제 퇴위 등을 주도하였던 침략의 원흉으로 평가받았지만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봉건 막부 정치를 타파하는 계기인 [[메이지 유신]]을 통해서 쇄국정책을 폐지하고 서양과의 교류와 문호를 개방한 주역이자 일본 근대화의 조상이자 아버지로 오늘날의 일본 경제를 부강하게 이끌어 왔던 선구자로 불릴 정도로 칭송받아 왔고 동시에 근대 일본의 초대 수상이라는 점에서도 국가적인 의미를 가진 위인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그 때문에 한일 양국이 이 의거를 어떻게 평가하는지도 서로 상이할 정도로 각각 안중근과 이토가 가해자와 피해자로 뒤바뀌어서 엇갈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